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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10분 출근의 심리학: 신입 개발자의 눈치 문화

9시 10분 출근의 심리학: 신입 개발자의 눈치 문화

9시 10분 출근의 심리학: 신입 개발자의 눈치 문화 매일 아침 알람은 8시 20분에 울린다. 샤워하고, 옷 입고,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사고, 버스 탈 시간을 계산한다. 정확히 8시 50분쯤 회사 건물 지하에 도착한다. 그다음부터는 심호흡을 한다. 사실 나는 8시 50분부터 9시까지 10분간 건물 로비 의자에 앉아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다. 왜 이러는 걸까? 이건 정말 이상한 버릇인데, 내가 유일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지난주에 우리 팀 인턴 최준호가 비슷하게 하는 걸 봤다. 9시 정각에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9시 15분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우리 눈이 마주쳤고, 우린 말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 순간 알았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회사의 문제, 아니 이 직장 문화 전체의 문제라는 걸.첫 출근부터 시작된 마음 속의 전쟁 8개월 전, 입사 첫날 이른 아침 6시에 깼다. 잠을 못 잤다. 부트캠프에서 6개월을 붙어 있다가 드디어 '진짜 직장'에 들어가는 거였다. 면접 때 "React 좀 할 줄 아세요?"라는 질문에 나는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그 대답이 제일 크고 싶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날은 몰랐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날 사무실에 도착한 게 8시 45분이었다. 일찍 도착해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신입 개발자의 열정이 그 정도였다. 그런데 사무실을 열고 들어갔을 때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었다. 책상들 앞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한 시간을 혼자 사무실에서 보냈다. 모니터를 켜고,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가 놨다. 메모장을 열었다가 닫았다. 정말 할 게 없었다. 9시가 되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들어오는 순서가 있었다. 팀장이 먼저, 그 다음 3년 차 선배 김태호, 5년 차 선배 이준수. 그리고 맨 마지막에 막내들이 들어온다. 아, 그리고 정확히 9시에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 9시 5분, 9시 10분, 심하면 9시 20분. 나는 8시 45분에 들어왔으니까 되게 열심히 보이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팀장이 불렀다. "이신입, 너 어제부터 있는 거 알지? 첫날부터 그렇게 일찍 올 필요 없어. 아침에 푹 자고 와. 여긴 그런 회사 아니야." 나는 "네, 감사합니다"라고만 했다. 그 순간부터 뭔가 헷갈렸다. 9시 정각이 정시인데 왜 일찍 오지 말라는 거지? 그럼 몇 시에 와야 하는 거야? 이게 눈치인 건가? 혼자 생각했다. 그걸 팀장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슬랙 메시지가 울리는 순간의 공포 이제 내 일과는 이렇게 시작된다. 9시 정각이 되기 5분 전부터 나는 노트북을 켜서 슬랙(Slack)에 들어간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치 이미 와 있었던 것처럼. 누가 진짜 먼저 슬랙에 연결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가 먼저 왔는데?"라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리고 9시 10분쯤 사무실에 정말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실 내 심장은 두근거린다. 오늘도 또 모르는 게 있을까? 오늘도 또 코드리뷰에서 야단 맞을까? 누군가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사무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슬랙의 안 읽은 메시지를 확인한다. 이 순간이 제일 무섭다. 빨간 숫자가 떴다는 건 뭔가 놓쳤다는 뜻이고, 그건 내가 '게으른 신입'이라는 뜻이고, 그건 결국 3개월 뒤 수습 평가 때 내가 탈락한다는 뜻이다.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지만, 새벽 4시에 눈이 떠질 때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난다.오늘 아침에도 슬랙에 메시지가 3개 있었다. 팀장: "좋은 아침이에요. 다들 오늘 미팅은 11시에 있습니다." 이건 괜찮다. 이준수 선배: "신입, 어제 PR 올린 거 봤어? 코멘트 달았어. 확인하고 수정해 줄 수 있어?" 이건 공식적인 업무니까 괜찮다. 그런데 마지막 메시지는... 김태호 선배의 '반응만'이었다. 내가 어제 올린 PR 코멘트에 👍를 눌렀다. 그건 뭐지? 좋다는 뜻? 아니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라는 뜻? 나는 이 반응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5분을 소비했다. 결국 결론은 "아마 좋다는 뜻일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특히 더 잘 보여야겠다"였다. 9시 10분에 사무실에 들어오는 게 정말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너무 이르면 '열심히 하려고 애쓰는' 신입으로 보이고, 정각에 들어가면 '규칙을 정확히 지키는' 신입인데 그건 뭔가 서툰 느낌이 나고, 너무 늦으면 게으른 신입이 된다. 9시 10분은 딱 맞는 타이밍이다. 9시 정각이 아니라는 건 '너는 우리 문화를 알고 있다'는 뜻이고, 10분 정도라는 건 '너무 뻔한 건 아니다'는 뜻이다. 이건 신입이 할 수 있는 최적의 눈치다. "이거 간단한 건데" 함정에 빠지다 어제 일은 정말 최악이었다. 오전 11시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미팅은 10시 50분에 시작됐다.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모두들 이미 앉아 있었다. 나는 제일 마지막에 들어갔다. 그리고 제일 어색한 자리에 앉았다. 팀장 옆. 팀장이 나를 보면서 웃었다. "신입, 너 요즘 기분은 어때?" 모두가 날 본다. 뭔가 심사하는 눈빛이다. 나는 "좋습니다"라고 했다. 더 이상 뭐라고 답할 수 없었다. 미팅 내용은 새로운 프로젝트였다. 우리가 하던 대시보드를 리팩토링하는 건데, 이번엔 Next.js를 쓸 거라고 했다. 나는 React를 쓰다가 Next.js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끄덕. 이건 내 버릇이 됐다. 모든 회의에서 나는 끄덕인다. 이해가 안 되면 더 끄덕인다. 미팅이 끝나고 이준수 선배가 나한테 왔다. "신입, 너 이 작업 하나 해 줄 수 있어? 사실 간단한 건데..."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간단한'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선배들에게 '간단한'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간단한 건데'는 '너 같은 신입이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라는 의미다. 그 작업은 폼(form) 밸리데이션이었다. 사용자가 입력한 데이터를 검증해서 서버로 보내는 기능. 나는 바로 "네, 제가 해볼게요"라고 대답했다. 큰 실수였다. 들어가서 코드를 봤을 때, 그건 정말 '간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TypeScript 제너릭(Generic)을 써야 했고, 커스텀 훅(custom hook)도 만들어야 했고, 에러 핸들링까지 정교하게 해야 했다.나는 ChatGPT에 물었다. "폼 밸리데이션 React 코드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리고 그 결과물을 그대로 복붙했다. 에러가 났다. 타입 에러였다. any를 쓰면 되겠지 했는데, 그 코드엔 any가 이미 10개 있었다. 나는 거기에 any 5개를 더 추가했다. console.log를 10개 찍으면서 뭐가 문제인지 찾으려고 했다. 3시간이 지났다. 이준수 선배가 등에 손을 얹었다. "신입, 뭐 하고 있어? 진행 상황 어때?"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완성 못 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진짜 상황을 물어보는 건가? 둘 다 위험했다. "아... 네네, 이거 좀 복잡한데요. 다시 해볼게요."라고 했다. 내 입버릇인 "아... 네네"가 나왔다. 이건 내가 불안할 때 무조건 나오는 말이다. 선배가 내 화면을 봤다. console.log 10개가 보였다. 그리고 any 15개가 보였다. "아, 그냥 제가 다시 한번 봐 줄까?"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속은 다르지만, 목소리는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선배가 5분 만에 수정했다. 정말 간단했다. 나는 그 코드를 다시 읽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퇴근하면서도 인프런에 접속하지 않았다. 눈치의 악순환: 누가 정말 책임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9시 10분의 버릇은 단순히 출근 시간 문제가 아니다. 이건 눈치 문화 전체를 상징한다. 우리 회사는 정식으로 "9시에 출근"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도 9시에 안 온다. 팀장은 9시 5분, 이준수 선배는 9시 20분, 김태호 선배는 9시 15분. 그리고 신입인 나는... 9시 10분. 이게 처음엔 회사 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9시에 오지 말라고 하면서 9시를 정시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이건 회사가 유연하다는 걸 보여주는 방식인 거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도 돼"라는 의사 표현인 거다. 근데 그 유연함이 오히려 더 큰 압박이 된다는 걸 회사는 모르는 것 같다. 신입 입장에서 보면, 9시 정각에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나는 회사 문화를 모르고 규칙만 따르는 사람입니다"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9시 20분에 들어가면? 그건 "나는 게으릅니다"라는 신호다. 9시 10분은 "나는 당신들이 뭐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늦습니다"라는 신호다. 이건 신입이 생존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문법이다. 근데 정말 웃긴 건, 이 문법이 실제로 일의 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다. 9시 10분에 들어온 신입이 더 좋은 코드를 쓰지는 않는다. 더 빨리 일을 끝내지도 않는다. 단지 "눈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을 뿐이다. 그리고 눈치가 있다는 평가가 회사에서 제일 중요한 능력인 것 같다. 코딩 실력? 그건 나중이다. 눈치가 있고 없고가 먼저다. 나는 정말 지쳤다. 매일 아침 10분 동안 건물 로비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준비하고 '지금부터 연기를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이 시간이. 그런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탈락할까봐서. 어제 부트캠프 동기들 단톡방에서 물었다. "너네 회사는 어때? 신입이라고 괜찮아?" 받은 대답은 다 비슷했다. "여긴 9시 정시인데 아무도 9시에 안 와. 왜 이러지?" "우리 회사도 그래. 정시가 뭐지?" "좋아. 그럼 우리 다 똑같네." 이상한데, 이게 이상하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도 바뀌지 않는다. 신입들은 계속 눈치를 본다. 선배들은 계속 그걸 당연하게 본다. 그리고 회사는 "우린 자유로운 회사야"라고 자랑한다. 아무도 이 악순환을 끝낼 생각이 없다. 그래도 내일 아침에도 내일 아침도 알람은 8시 20분에 울릴 거다. 나는 또 8시 50분에 건물 로비에 도착할 거고, 9시 10분에 사무실에 들어갈 거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이게 이미 내 몸에 배인 습관이 됐으니까. 신입이라는 신체가 눈치를 본다는 신호를 받으면 자동으로 반응한다. 근데 언젠가 나도 이준수 선배처럼 9시 20분에 들어올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이 모든 불안이 사라질까? 아니면 그때쯤엔 새로운 신입에게 같은 걸 하게 될까? 정말 답답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눈치 본다는 건 결국 내가 이곳에 속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