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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만
- 09 Dec, 2025
회의 중 고개만 끄덕이기, 신입의 생존 기술
회의 중 고개만 끄덕이기, 신입의 생존 기술 오늘도 회의 오전 10시. 슬랙에 알림. "30분 후 회의실 B. 신기능 설계 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계 논의. 내가 뭘 알아. 일단 노션 켰다. 지난주 회의록 검색. "API 구조 재설계, Redis 캐싱 도입 검토" Redis가 뭐더라. 검색했다. "인메모리 데이터베이스". 아직도 모르겠다. 10시 28분. 화장실 갔다 왔다. 회의 2분 전에 들어가는 게 제일 안전하다. 너무 일찍 가면 선배랑 어색한 대화해야 함.회의실 입성 문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벌써 앉아있는 선배들. 김 선배, 박 선배, 팀장님. 나는 제일 구석 자리. 노트북 열고, 메모장 켰다. 펜도 꺼냈다. 쓸지 모르지만. 팀장님이 말을 시작했다. "이번에 유저 피드 성능 개선하려고 하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유저 피드. 그거 내가 건드린 적 없다. "현재 API 응답속도가 평균 2.3초거든." 끄덕. 2.3초가 느린 건가 빠른 건가. "DB 쿼리 최적화랑 캐싱 레이어 추가 검토 중이야." 끄덕끄덕. 캐싱 레이어. 어디다 추가하는 거지. 김 선배가 말했다. "Redis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세션 관리도 같이 옮기면 어때?" 끄덕. Redis. 아까 검색한 그거. 세션 관리는 또 뭐지.모르는 용어의 향연 박 선배가 화이트보드에 뭔가 그렸다. "클라이언트-서버-DB-Redis 구조로 가면." 끄덕. 화살표가 5개쯤 그려졌다. 하나도 모르겠다. 팀장님이 물었다. "신입이는 어떻게 생각해?" 심장이 멈췄다. "아...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한 말이다. 좋을 것 같다니. 뭐가. "구체적으로는?" 끝났다. "음... 성능도 개선되고, 유지보수도 편할 것 같아서요." 유지보수. 어디서 들은 단어.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았다. 김 선배가 말을 이었다. "TTL은 얼마로 잡을까?" 끄덕. TTL. Time To Live인가. 아닌가. 메모장에 적었다. "TTL - 나중에 검색" 회의가 40분째 진행 중이다. 내가 한 말은 딱 한 문장. 고개는 스무 번 넘게 끄덕였다. 끄덕임의 기술 회의 중 고개 끄덕이기에도 기술이 있다. 너무 자주 끄덕이면 이상하다. "너 진짜 이해하고 있어?" 너무 안 끄덕이면 더 이상하다. "너 듣고 있긴 해?" 적당히 끄덕여야 한다. 3초에 한 번. 아니면 문장 끝날 때. 선배가 나를 쳐다보면 더 끄덕인다. "네네, 맞습니다." 팀장님이 말할 때는 살짝 앞으로 몸을 기울인다. 경청하는 자세. 실제로는 하나도 안 들린다. 메모는 계속 한다. 뭐라도 적는다. "Redis 검토", "성능 개선", "API 2.3초" 나중에 읽어보면 아무 의미 없다. 그래도 적는다. 적는 사람은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질문이 무서운 이유 회의에서 제일 무서운 순간. "질문 있어?" 없다. 질문하면 더 모르는 게 드러난다. 한 번 질문했던 적 있다. "저기, API 엔드포인트가 정확히 어디 있는 건가요?" 선배들이 나를 쳐다봤다. 3초간 침묵. 김 선배가 말했다. "너 이거 작업하기 전에 문서 읽었어?" 죽고 싶었다. 그 이후로 질문 안 한다. 모르면 나중에 검색한다. 회의 끝나고 선배 책상 옆 지나가면서 슬쩍 물어본다. "저기, 아까 말씀하신 Redis 관련해서..." 일대일이면 덜 창피하다. 회의실에서는 무조건 끄덕인다. 이해하는 척한다. 살아남는다. 회의 후 현타 회의 끝났다. 50분 진행. 노트북 덮고 일어섰다. 선배들은 계속 얘기하고 있다. "그럼 이거 내일까지 POC 만들어볼게." POC. 또 모르는 단어. 자리로 돌아왔다. 아까 적은 메모 봤다. "Redis 검토" "TTL" "캐싱 레이어" "POC" 하나도 모르겠다. 구글 켰다. "Redis란 무엇인가" "TTL 뜻" "POC 개발 용어" 검색 결과 읽었다. Proof of Concept. 개념 증명. 아. 이제 알았다. 회의 중에는 몰랐다. 메모장에 정리했다. 나중에 또 까먹을 거다. 슬랙에 회의록이 올라왔다. 김 선배가 작성. 읽어봤다. 회의 중에 들었던 내용이 맞긴 한데.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선배도 그랬을까 점심시간. 편의점 갔다. 김치찌개 도시락 데웠다. 김 선배가 옆에 앉았다. "신입이, 오늘 회의 어땠어?" 심장이 또 쿵. "아... 좋았습니다." "이해되긴 했어?" 끝났다. 솔직하게 말할까. "솔직히... 반은 모르겠어요." 김 선배가 웃었다. "나도 신입 때 그랬어." 진짜? "나는 80% 몰랐는데." 위로가 됐다. "지금도 가끔 모를 때 있어. 그럼 나중에 검색하지 뭐." 선배도 그랬구나. "회의 중에 모르는 거 물어보기 무섭지 않았어요?" "무섭지. 그래서 안 물어봤어. 너처럼." 웃었다. 처음으로. "근데 나중에 보면 다 별거 아니더라. 하나씩 알아가는 거야." "네." "오늘 회의 내용 중에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회의실 밖에서." 고마웠다. 도시락 먹으면서 물어봤다. "Redis가 정확히 뭔가요?" 김 선배가 설명해줬다. 10분 동안. 회의실에서 들었던 것보다 10배 이해가 잘 됐다. 그래도 나는 끄덕인다 오후 3시. 또 회의 알림. "긴급 회의. 버그 대응" 또 회의실 갔다. 또 끄덕였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API 응답 지연"이라는 말이 들렸다. 아까 점심시간에 김 선배한테 들은 내용이다. "Redis 캐싱으로 해결 가능할까요?" 내가 말했다. 선배들이 나를 봤다.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방법이네." 살았다. 아니, 살았다를 넘어섰다. 회의가 20분 만에 끝났다. 짧은 회의가 제일 좋은 회의다. 자리로 돌아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한 말이 말이 됐다. 처음이다. 메모장에 적었다. "오늘 회의에서 Redis 얘기 꺼냄. 팀장님이 끄덕였음." 작은 성공이다. 하지만 성공이다. 언젠가는 저녁 7시. 퇴근 준비. 오늘 회의 두 개. 끄덕인 횟수 아마 50번. 실제 이해한 비율 30%. 그래도 괜찮다. 입사 8개월. 처음엔 10%도 못 알아들었다. 지금은 30%. 3배 성장이다. 내년 이맘때면 50%쯤 될까. 2년 후면 김 선배처럼 설명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회의실에서 끄덕이는 게 창피했다. 지금도 창피하다. 하지만 이게 신입의 생존 기술이다. 끄덕이면서 배운다. 모르는 걸 적고, 나중에 찾아본다. 선배들한테 하나씩 물어본다. 조금씩 이해한다. 언젠가는 나도. 회의에서 먼저 말하는 사람이 되겠지. 그때까지는. 오늘도 끄덕인다.회의 후 검색창에 남은 단어가 다섯 개. 내일은 네 개로 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