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제가 해볼게요'라고 했다가 후회하는 시간
- 10 Dec, 2025
‘이거 제가 해볼게요’라고 했다가 후회하는 시간
오늘도 또 그랬다
오전 10시. 팀 데일리 스크럼.
선배가 물었다. “이거 누가 할 수 있어?”
나는 손을 들었다. “제가 해볼게요.”
선배가 웃었다. “오, 좋아. 그럼 신입아 부탁해.”
회의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노트북 앞에 앉았다.
…뭐라고 했더라.
메모를 봤다. “API 연동 후 상태관리 리팩토링.”
리팩토링이 뭐지.
아니, 안다. 코드 정리하는 거다. 근데 어떻게?
손이 떨렸다. 키보드를 쳤다. 지웠다. 다시 쳤다.
오늘도 시작됐다. 후회의 시간.

왜 자꾸 그러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봤다. 내가 왜 이러나.
선배가 물으면 일단 “해볼게요”가 나온다. 입에서 자동으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생각 안 한다. 그냥 나온다.
머릿속에서는 경보가 울린다. ‘너 이거 못 하는데?’ ‘이거 모르잖아?’
근데 입은 먼저 움직인다. “제가 해볼게요.”
왜일까.
아마도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잘 보이고 싶다. 신입이니까. 일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무능해 보이고 싶지 않다.
둘째, 거절을 못 한다. “저 이거 못 해요” 이 말이 안 나온다. 못 한다고 하면 실망시킬 것 같다.
그래서 일단 받는다. 생각은 나중에.
결과는? 지금처럼 책상 앞에서 식은땀 흘린다.
3시간째다. 진도는 10%.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나
구체적으로 적어본다.
월요일 오전 선배: “이거 간단한데, 드롭다운 컴포넌트 만들어줄래? 재사용 가능하게.” 나: “네, 해볼게요.”
월요일 오후 검색: “react reusable dropdown component” 결과: 20개 탭 열림 코드: 복붙 → 에러 → 다시 복붙 → 또 에러
화요일 선배: “어떻게 돼가?” 나: “거의 다 됐어요.” (거짓말) 실제 진행률: 30% 머릿속: 패닉
수요일 야근 시작. 9시까지. 코드는 동작한다. 근데 왜 동작하는지 모른다. 복붙의 승리.
목요일 PR 올림. 심장이 두근거린다. 선배의 코멘트: “이 부분 useCallback 써야 할 것 같은데?” 나: useCallback이 뭐더라.
이게 반복이다. 매주.
“제가 해볼게요” → 모르겠음 → 구글링 지옥 → 야근 → 동작은 하는데 이해는 못 함 → 코드리뷰 공포.
왜 이럴까. 왜 처음에 “저 이거 배우면서 해도 될까요?”라고 못 하나.
자존심? 아니다. 그냥 패턴이다. 나쁜 패턴.
최악의 순간들
기억나는 것들 적는다.
케이스 1: 테스트 코드 선배: “테스트 코드 좀 짜줄래?” 나: “네!” (테스트 코드를 한 번도 안 짜봤다) 결과: Jest 공식 문서 3시간 읽음 → 하나도 이해 못 함 → 결국 선배한테 “도와주세요” → 선배가 30분 만에 다 짜줌.
처음부터 모른다고 할 걸.
케이스 2: 타입 정의 선배: “이 API 응답 타입 정의해줄 수 있어?” 나: “할 수 있습니다!” (제네릭이 뭔지 모른다) 결과: 5시간 동안 any만 써서 완성 → 코드리뷰에서 “이거 타입 의미가 없는데요” → 선배가 다시 작성.
시간 낭비의 정석.
케이스 3: 성능 최적화 선배: “이 페이지 좀 느린 것 같은데, 최적화 좀 해볼래?” 나: “해보겠습니다!” (최적화를 해본 적이 없다) 결과: useMemo 막 갖다 붙임 → 더 느려짐 → 선배가 “뭐 한 거야” → 롤백.
민폐의 끝.
매번 이런다. 매번 후회한다. 근데 또 한다.
내가 이상한가.

동기들도 그런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너네도 ‘해볼게요’ 하고 후회해?”
답장이 왔다.
재민: “ㅋㅋㅋ 매일” 수진: “나 어제도 그랬음 ㅠㅠ” 민수: “형 그거 신입의 숙명임”
다들 그렇다.
재민이 보낸 메시지: “선배가 ‘이거 할 줄 알아?’ 물으면 대답은 세 가지야.
- 네 (거짓말)
- 네… (거의 거짓말)
- 아마도요 (완전 거짓말)”
웃겼다. 근데 웃프다.
수진이 말했다. “나는 이제 ‘배우면서 해봐도 될까요?‘라고 물어봐. 솔직하게.”
현명하다. 나도 그래야 하는데.
민수는 달랐다. “형은 그냥 다 받아. 그래야 배워. 야근해도 돼.”
극단적이다. 근데 이해는 된다.
결론: 다들 비슷하다. 신입은 다 이렇다.
위로가 됐다. 그래도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선배는 뭐라고 했나
용기 내서 물어봤다. 점심시간에 선배한테.
“선배님, 제가 자꾸 ‘해볼게요’ 하고 못 하는 것 같아요.”
선배가 웃었다. “나도 그랬어.”
진짜?
“신입 때 무조건 다 받았지. 근데 반은 못 했어. 창피했어.”
선배도 그랬다니. 신기하다.
“그럼 어떻게 하셨어요?”
“일단 받되, 바로 물어봐. ‘이거 어떻게 시작하면 되나요?’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나요?’ 미리 물어보는 게 나중에 뒤집는 것보다 낫거든.”
그렇구나.
“그리고 진짜 모르는 건 솔직하게 말해. ‘저 이거 처음이라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이렇게.”
간단한데 왜 생각 못 했을까.
“선배들도 다 알아. 신입이 뭘 모르는지. 티 안 내려고 해도 티 나거든. 차라리 솔직한 게 나아.”
속이 시원했다.
선배가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배우는 단계야. 실수해도 돼.”
고마웠다.
그날 오후부터 달라졌다. 모르는 거 바로 물었다. “이 부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선배가 5분 설명해줬다. 나는 2시간 삽질 안 했다.
효율적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결론을 내려야 한다.
앞으로의 방침:
1. ‘해볼게요’ 하기 전에 3초 생각한다
- 진짜 할 수 있나?
- 얼마나 걸릴까?
- 도움이 필요한가?
2. 조건부로 답한다
- “배우면서 해봐도 될까요?”
-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 “도중에 막히면 여쭤봐도 될까요?”
3. 막히면 바로 물어본다
- 2시간 삽질하지 않는다
- 30분 안 풀리면 슬랙 멘션
- 혼자 끙끙대는 게 민폐다
4.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 신입이니까
- 배우는 중이니까
- 완벽할 필요 없으니까
이렇게 해보기로 했다.
며칠 지났다. 조금 나아졌다.
오늘 선배가 물었다. “이거 할 수 있어?”
나는 답했다. “해보고 싶은데요, 중간에 막히면 여쭤봐도 될까요?”
선배가 말했다. “그럼. 막히면 바로 물어봐.”
마음이 편했다.
일은 절반 시간에 끝났다. 물어봤더니 쉬웠다.
왜 진작 이렇게 안 했을까.
마무리하며
여전히 “제가 해볼게요”라고 먼저 말한다.
근데 이제는 다르다. 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한다. 조건을 단다. 도움을 요청한다.
후회는 줄었다. 야근도 줄었다. 스트레스도 줄었다.
완벽하진 않다. 가끔 또 옛날 버릇이 나온다. 일단 받고 나중에 패닉.
그래도 괜찮다. 배우는 중이니까.
신입이니까.
“해볼게요”와 “도와주세요” 사이의 적절한 균형, 그게 답이다.
